적성현읍지(積城縣邑誌)에 의하면 감악산 묘(廟)가에 있다. 전설에 설인귀의 사적비라고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없어졌으므로 고증할 수 없다고 했다. 이 고비에 대해서는 대체로 〈설인귀〉설과 〈진흥왕 순수비〉설로 대립요약되고 있다. 광무(光武)3년(1899) 발행(적성군지)와 속전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고 산신으로 봉해져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향(祭享)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의 사적이 뚜렷하여 사적비를 건립할 만하다는 것이 설인귀 사적비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한편, 1982년 동국대 감악산 고비 조사단에서는 2차에 걸친 조사결과 이 비의 비문이 마멸되어 판 독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그 형태가 옛스럽고 북한산비와 전체적인 외형이 흡사하다는 점, 또 적성은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지로서 특히 신라 진흥왕 세력이 미쳤던 점등 고비의 양식과 위치로 미루어 순수비로 추정했던 것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폭 70-79cm, 두께 19cm이며 석재는 화강석이다.』
감악산(675m)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전곡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조선시대에는 북악, 송악, 관악, 심악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였다.
정상에 오르면 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의 산과 들이 눈앞에 펼쳐지며,
산 정상에는 마모된 감악산비가 석대위에 서있다.
파주시 향토 유적 제8호인 이 비는 글자가 없다고 하여 몰자비 또는 설인귀사적비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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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파평산 너머 강화도가, 북쪽으로 등줄기를 세우고 있는 개성 송악산이, 남쪽으로 오밀조밀한 능선의 북한산이, 동쪽으로 소요산 건너 가평의 명지산이 아스라히 펼쳐진다. 그 산들이 둥글게 에워싼 세상의 한 중심에 감악산이 있다. 더욱이 넓은 파주 평야가 발 아래 펼쳐져 있어서 감악산 봉정은 우뚝 솟은 전망대나 다름없다. 신기하게도 감악산보다 더 높은 북한산이나, 거의 두배 높이의 명지산(1267m)조차도 발아래 푸르스레하게 보인다.
고향이 파주인 당나라 장수 설인귀 는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남았는데, 고국을 위해 선정을 많이 베풀어 주민들이 공적 비를 세워줬다는 설이 전해진다.
옛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 빛과 푸른 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렸다.
설인귀비와 관련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죽은 설인귀의 원혼이 감악산에 자리잡아 영험을 나타낸다는 속설이 무당들 사이에 퍼지면서 80년대 후반부터 무당이 줄줄이 들어섰다. ...
적성에는 설인귀에 대한 전설이 많다. 이는 설인귀가 실제 인물이요, 또 적성에서 고구려 원정을 한 장수이므로 자연히 많을 수 밖에 없다. 기록상으로 설인귀사,설인귀 산신( 山神 )추대, 설인귀비(몰자비,沒字碑),글안병의 퇴각 등에서 설인귀의 전설을 볼수 있다. 설인귀는 본래 지금의 적성면 주월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힘이 장사이므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지냈다. 설인귀가 얼마나 힘이 셌던가 ? 한 번은 상산 김씨 의 묘를 쓰는 데 묘자리에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하여 당시의 권세로 각 동리에 배당하여 그 나무를 캐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주월리에 배당된 나무는 설인귀가 자청하여 자기가 캐내겠다고 하므로 동리사람들도 그의 힘센 것은 알고 있는 터라 쾌히 승낙하였으나 묘쓸 날이 다가와도 도무지 나무를 캐내지 않고 있었다. 동리사람들이 걱정하고 독촉하니 설인귀가 술 세독을 준비하라 하고 당일이 되자 술 세독과 돼지 한 마리를 먹고는 나무를 뽑아내는데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뽑아 버렸다고 한다. 설인귀가 한번은 지금의 율포리 앞 강 석벽에 이르렀더니 석벽이 갈라지면서 용마( 龍馬 )가 뛰어나오는게 아닌가, 설인귀가 그 용마를 잡으니 용마는 가만히 있었다. 또 배운리(白雲里) 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리는 것을 캐어보니 큰 궤가 나오는데 그 속에 갑옷, 투구, 칼이 있어서 설인귀 이외에는 입을 사람이 없기로 설인귀가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용마와 갑옷,투구,칼을 얻은 설인귀는 적성일대를 돌아다니며 훈련을 하였다. 그의 말발굽이 가장 많이 지나간 지금의 마지리( 馬智里)는 실은 마제리(馬蹄里)였던 것이다. (이것은[여지승람]에도 (馬蹄里 )로 기록되었다. )또 설마치 계곡에는 설인귀가 가지고 놀던 "공기돌"이 6.25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 감악산 산정에 비가 남아 있는데 글씨가 다 지워져서 알 수가 없으므로 이를 몰자비(,沒字碑)라 하는데 이를 현주민들은 "빗돌대왕"이라 한다. 이 빗돌은 군 작전상 철거를 하였더니 자주 사고가 나서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본래는 갓이 없었던 것을 갓을 만들어 씌웠다. 이 빗돌 대왕은 본래 설마치 길가에 세워져 있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비 뒤에서 남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용변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또 수령(守令)이 통과할 때도 이 곳에 이르면 모두 하마(下馬)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감악산 7개 부락에 소 가진 사람에게 한결같이 현몽하기를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소를 하루 밤 빌려 달라고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마굿간의 소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으나 소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빗돌대왕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후에 알아보니 그 빗돌대왕이 감악산 꼭대기에 서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 파주시 http://city.paju.kyonggi.kr
설인귀(薛仁貴) 장군 유적의 설화
설인귀는(613~682) 용문출신으로 서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군졸을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후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랑장 소정방과 고구려 적봉진을 침략 658년(보장왕 17)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되어 주장 이세적과 육군을 이끌고 봉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제성을 공략하였다. 666년(보장왕 25) 고구려장수 막리지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에게 쫓겨 그를 입당시킨 사실과 신라에서 구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으로 요동안무대사 契芯何方을 도와 내침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 목저, 창함성을 협공 드디어 남산은 중신 등과 당영에 나가 항복함에 따라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9월 21일 역사적인 최종의 치욕일(始祖 朱蒙으로부터 28왕)로서 705년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 설인귀는 검교 안동도호부 총독이 되었다. 648년 이때 신라무왕(제30대왕)의 의도(意圖)를 책망하는 장문을 보내자 진덕여왕(38대왕)은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 토지를 모두 그대에게 주어 편안하게 하려한다는 내용에 변명서를 보내 왔으며 신라의 정당한 요구에 대변을 삼았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땅을 대부분 점령한 후 설인귀는 671년(신라문무왕 11) 계림도 행군 총관으로서 신라에 내침하였으며 이어 675년(문무왕 15) 신라 숙위학생 풍훈을 향도로 삼아 풍성강을 침공하였다. 연이어 나장문훈에게 대해 이듬해 문무왕 16년 11월 금강하류 소벌포에서 거듭 패전 후 678년(문무왕 17)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무순(봉천)으로 이치함으로 나당간 무력 충돌이 종식되었으며 설인귀는 그 후 본위대 장군이 되어 평양군공에 봉해졌다 한다. 그동안 조사한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장군은 적성면 주월리 백옥봉하 오환면적오제갈지에서 가난한 집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명기한 용문은 바로 이곳인지도 모를 일이다. 설인귀는 구척 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 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한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무건리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무건리로 호칭하였다. 또한 첫 새벽과 저녁으로 주월리 집에서 두지리를 거쳐 마제리로 호칭하였고, 설마치 계곡에서 설인귀가 가지고 놀던 집더미같은 공기돌 등등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이와 같은 유래를 상고해 보면 서기 612년(영양왕 23)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수륙양군 113만 3천 8백여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을지문덕장군이 거짓 항복하여 적장 우문술, 우중문을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 회군 할 것을 종용한 후 살수(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수나라 후군을 맹격 30만 5천여명 중 2천 7백만여만이 돌아가게 하였다는 지략과 무용이 뛰어난 무서운 장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45년(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을지문덕 막하에서 미움을 사게 된 설인귀장군은 당태종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이를 구원하여 입당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한 그 후에도 나당 연합군을 인솔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그가 죽은 후 설마치 고개 길가에 옛날 주민들이 세운 설인귀 추모사적비가 있는 곳을 수령들이 지나갈 때 말이 가질 않아 하마하여 절을 한 후 통과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결하게 되자 감악산하 7개 부락에 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현몽하기를 호걸이 장대한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소를 가진 여러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양간에 소를 보니 소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며 설마치 고개마루(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 있던 이 화신비석이 감쪽같이 감악산정(해발 675m)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설인귀 사적비 단은 높이 170cm, 두께 19cm, 넓이 70~79cm의 화강암으로 상위가 하위부분보다 약간 넓은 편이며 기단은 자연석 1장으로 4단이 형성되어 있다. 고려때에는 봄가을 조정에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在紺嶽山頂一問隆香祝致祭)를 지냈다하며 감악산신으로 봉했다는 전란사와 민간 신앙조에 기술된 사실과 현종 5년 거란이 침입 당시 감악산사에서 병마와 깃발이 나부꼈다는 설 또한 고려 충렬왕 13년 6월 그의 두 왕자에게 도만호의 관직을 주어 감악산신에게 음조를 기구한 것으로 보아 이때 산신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 적성군지 고려조에 의하면 육계토성에서 설인귀가 태어났고 이의신이 설인귀비를 발견하였다 하였으며 충렬왕 3년 4월 감악산에 친제를 지내려다가 두지진에서 익사한 사건과 조선조 태종 11년 6월에 산제 봉행과 연산군 6년 2월 감악산 신당 보수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설인귀장군 추모비이며 본 고장 출신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근년에 이 비석을 군작전상 철거를 하였더니 자주 사고가 난다하여 이 자리에 다시 세우니 무사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각계 각층의 학자들도 이 비석에 의아심을 품고 유적을 세밀히 조사한바 너무 오래되고 비와 풍화작용으로 글자가 보이지 않아 봉전몰자비 또는 빗뚤대왕비, 진흥왕 순수비 등 구구각색으로 논란이 많다. 이는 앞으로 좀더 연구하여야 할 숙제라 하겠다.
감악산(紺嶽山)에 얽힌 전설
이 산은 옛날 경기 오악(松岳, 紺岳, 雲岳, 北岳, 冠岳)중에 하나로서 감악사(紺嶽寺), 신암사(神岩寺), 운계사(雲溪寺)등이 있었고 정상에 산신과 설인귀(薛仁貴)를 모시고 제사지냈다는 감악사(紺嶽祀)가 있었다 한다. 고려시인 임춘(林春)은 감악산의 형상을 잘 표현한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조물소아진호배롱(造物小兒眞好弄) : 조물주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좋아하였는지 박사희작천봉상(博沙戱作千峯象) : 모래를 모아다가 많은 산봉우리를 만들었네 자산수미강수주(玆山首尾羌數州) : 이 산머리에서 끝까지 몇 고을을 깔고 앉았는데 천외회상여무봉(天外廻翔如舞鳳) : 그 모습 하늘을 뚫고 나는 봉황과 같도다 감악사는 현재 폐사되었으나 적성면 객현리 배문리 마을에서 약 500미터 거리에 절터가 남아있는데 이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동각태학사(東閣太學士) 김신윤(金莘尹)이 술을 거나하게 취하여 권세가 있는 송도 사람들을 욕을 하다가 미움을 받고 도망을 나와 감악산에 들어와 잠시 묵어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니 황빈연이 늙고 피곤한 모습을 가엾이 여겨 허락을 하였더니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자고 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화로에 부젓가락으로 재를 뒤적거리며 글자를 그리므로 좌중사람들이 늙은이가 글자를 안다고 힐난을 하였다. 아침이 되어 김신윤의 아들 온기( 琦)가 과거에 급제하여 찾아와서 뜰아래에서 절을 하니 황빈연이 깜짝 놀라며 땅에 엎드려 사과를 하는지라 김신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범주(范주)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것을 어찌 궁한 늙은이가 이미 알았으랴 하고 서로 북쪽 산봉우리에 올라 소나무밑 돌 위에 앉아 술을 같이 마시고 즐기면서 송풍(松風)을 제목으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학한난득수 승정독여롱 (鶴寒難得睡 僧定獨如聾)(金莘尹)
날씨가 추우니 학은 잠들기 어렵고 중이 좌선에 드니 벙어리와 같고나
단송현원용흔장백학충 (斷送玄猿傭欣場白鶴沖) (黃彬烈)
검은 원숭이 휘파람 불어보내고 백학은 하늘을 뚫고 날아가네
감악사는 신라에서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았다고 내려오고 있으며 고려 현종 5년 글안군사가 장단에 이르렀을 때 감악산에서 정기(旌旗)와 군사가 있는 듯 함으로 크게 두려워하고 감히 전진을 못하였다 하며 고려 충렬왕은 원나라 황제를 도와 내안(乃顔)을 토벌하려 할 적에 설인귀를 제2신으로 봉해서 도만호(都萬戶)를 삼고 신의 음공(蔭功)을 빌었다 한다.
신라이당장설인귀위산신 본조명산재중사춘추(新羅以唐將薛仁貴爲山神 本朝名山載中祀春秋)강향축이제 고려현종오년단병지장단감악사약(降香祝以祭 高麗顯宗五年丹兵至長湍紺岳祠若)
유정기사마단병구이부감전우충열왕장특여원조제(有旌旗士馬丹兵具以不敢前又忠烈王將特如元助帝)
토급안봉신제이위도만호익익음공야(討及顔封神第二爲都萬戶益翼蔭功也)(積城邑誌)
또한 선비와 서민 모두가 감악산의 산신을 숭상하고 공경해 친제를 올렸는데 당시 지중문하사(知中門下事) 민유(閔儒) 전소윤(前少尹) 김서지(金瑞芝)등이 감악산에 제사를 지내려고 장단진(두지진)을 건너다가 익사하게 되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방우정(方于楨)이 제사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여 일시 중단되었다 한다.
충선왕3년4월제감악산시유상귀공향토서개친제(忠宣王三年四月祭紺岳山時裕尙鬼公鄕土庶皆親祭)
중부지방 외래 장군신과 남이 장군신
김선풍 / 중앙대 교수
굿판에 앉아 있노라면 12거리 중구능굿(또는 군웅(群雄)굿, 구웅장수굿, 놋동우굿)이라는 제차(第次)를 만나게 된다. 군웅은 인간의 수(壽)와 복(福)을 관장하는 여러 신격(神格)을 뜻하는데, 지역에 따라 군웅신의 모습은 달리 나타난다. 곧, 강릉일대 무꾼(巫覡)들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주인공의 한 사람인 조자룡(趙子龍)을 들춘다거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金庾信) 장군을 지역 장군신으로 정해 그 분의 위대성을 기리고 있으며, 서해안 일대에서는 최영 장군과 임경업 장군의 넋을 불러 온 마을의 안과태평을 소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민속은 인간적이라는 데 중점을 맞출 수 있다. 생시(生時)에 인간이 인간을 위해 주고, 사시(死時)에 인간이 사자(死者)를 생시(生時)처럼 모신다는 인도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사에 그 깊은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란 몇몇 승자(勝者)들에 의해 끌려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한 관점으로 응시하노라면 정사(正史)라는 것에는 서민사가 빠져 있고, 보통의 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룩되어진 신념의 푯대마저 소위 선민의식을 가진 소수 몇몇 성씨나 집권자들에 의해 무참히도 유린·박탈당한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을 품고 사라진 장군 중에서 최영 장군, 임경업 장군이 서해안의 서낭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주지하는 바이다.
한국 무속은 한(恨)의 매듭을 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못 다한 한(恨)을 서리서리 풀어나가듯 장군신들은 얼기설기 얽혀있는 사연들, 비련(悲戀)들을 풀어주기 바쁘다. 한(恨)으로 갔던 장군들이기에 한의 매듭을 풀어 줄 신격으로 승화된 것이다.
우리 무속에는 그 지방에서 덕치(德治)를 했다거나, 선정(善政)을 베푼 분들을 신격화시키는 신격화(神格化) 문법이 있다. 이것은 내국인(內國人)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소위 외래자형(外來者型) 무신(巫神)과 민중형(民衆型)무신(巫神)으로 나눌 수 있는데 경기도 일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자는 감악산 지신(紺岳山之神)이 후자는 남이(南怡) 장군신(將軍神)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감악산(紺岳山)의 서낭신부터 살펴보자, 경기도 파주군 남면 황방리 감악산 정상에는 속칭 '빗돌 대왕비'라고 하는 설인귀사적비(薛仁貴事蹟碑)가 있다. 적성면, 금교면, 양주군에 걸쳐 있는 높이 675m의 감악산, 이산은 「삼국사기(三國史記)」잡지 제사조에 보면 신라시대부터 고성(高城)의 상악(霜岳), 설악(雪岳), 북한산주(北漢山州)의 부악(負岳)과 더불어 매년 국가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던 명산이요, 신산(神山)이었다.
「태조실록」에 조선시대 궁중에서 이산에 별기은(別祈恩)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태조(李太祖)는 삼각산(三角山), 백악산(白岳山)과 더불어 호국산으로 여겼고 기우제(祈雨祭)까지 지냈으며, 강릉에는 구한말까지 대성황사(大城隍祠)에 모신 12신위(神位)의 한 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장군의 신권(神權) 영향으로 볼 때 강릉지방은 김유신 대장군이 터를 잡고 있는 지역인지라 감악산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고, 전에는 신라의 김이사부 대장군도 굿판에서 무가의 주인공으로 올렸음직 하나 찾을 길 없어 서운할 뿐이다.
감악산신은 무가에서는 제석거리에서 '감악산 천총대왕'이라고 부르는 분으로 등장하고, 문헌에는 당나라 장군인 설인귀가 죽어서 된 신이라고도 하며, 일설(一說)에는 한(漢)나라 때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던 감악 장군이 이곳 경기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치제(致祭)를 올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흥미롭게도 강릉 대성황사(大城隍祠)에는 주로 신라적 인격신위(人格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곧, 태백대왕신(太白大王神), 송악산지신(松岳山之神), 남산당제형태상지신(南山堂帝形太上之神), 감악산대왕지신(紺岳山大王之神), 성황당덕자모지신(城隍堂德慈母之神), 신무당성황신(神武堂城隍神), 김유신지신(金庾神之神), 이사부지신(異斯夫之神), 초당리부인지신(草堂里夫人之神), 범일국사지신(梵日國師之神)이 그것이다.
동물 중 우공(牛公)은 군웅들의 상징이다. 오늘날도 시골에 가면 마구간 안에 흰 천이나 흰 창호지를 오려 묶어 기둥에 달아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군웅신체(群雄神體)이다.
좋은 음식이 들어온다거나 아름다운 옷감이 들어올 때면 으레 조금씩 끊여서 이곳에 붙여 놓아야 1년 내내 가내가 평안하다고 한다. 집안에서 안택(安宅)을 할 때도 마구간의 군웅신에게 상을 올린다. 이처럼 집안에서는 '군웅맞이'가 되나 부락 단위일 때는 '장수굿(장군굿)'이라고 한다거나 '군웅장수굿'이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어떻게 설인귀라고 하는 중국의 인물이 장군신의 대열에 끼어 들었을까가 의문이다. 우선 고대소설인 「설인귀전」의 경계를 더듬어 보자.
설인귀는 원래 강주(絳州) 용문(龍門) 태생인데 당나라 태종 때 용문현의 설영과 그의 아내 번씨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자라면서 말을 잘 못하는 눌어증이 있었는데 15세 때 책방에서 잠을 자다가 백호(白虎)가 달려드는 꿈에 놀라 말을 하게 된다. 한편, 태종은 꿈속에서 장차 동정(東征) 때 백포장군 설인귀가 자기를 구해 주리라는 예조를 얻게 된다. 인귀는 육도삼략을 공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해주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유원회의 집에 기식을 하던 중 그의 딸 금화를 얻게 된다. 인귀는 의형제를 맺은 주청의 권유로 동정정벌에 참가하기로 한다.
그때 태종은 장사귀 장군을 용문현으로 보내서 인귀를 찾아오게 하였으나, 장사귀는 자기 위치가 흔들릴까봐 투군한 인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이나 투군했으나 거절당했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번홍해의 딸을 구해 주고 그녀를 부실로 삼게 된다. 다시 세 번째로 투군장을 내니 장사귀는 인귀에게 설례로 개명하게 한 다음 그를 받아들인다.
태종은 을지경덕을 완수로, 장사귀를 선봉장으로 삼아 전장에 나선다. 인귀는 큰 굴에서 보살한테 얻은 다섯 가지 보배로 만나는 적을 모두 물리치게 되나 그 공을 장사귀는 황제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런데 태종이 사냥 중에 합소문에게 사로잡히게 되는 데 지혜로 태종을 구하게 된다. 태종이 그가 꿈속에 나타났던 인귀란 것을 알게 되자 장사귀 일당을 모두 쫓고 인귀를 원수에 봉한다는 이야기이다.
그에 대한 실존 연대는 고대소설과 다소 차이가 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 평안도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로 부임하였던 사람으로 한국 땅에 와서 선정을 베풀었던 인물일 가능성을 배재 할 수 없다. 고대소설은 18C에 「설인귀전」이 들어와서 영웅소설 또는 군담소설에 속하는 「유충렬전」,「소대성전」,「장국진전」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설인귀는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한국 무의 신령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동국여지승람」적성현(積城縣) 사묘조(祠廟條)의 기록은 그가 신라때부터 무속례(巫俗禮)로 자리잡을 수 있는 인물이었음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감악산사는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고 있다. 감악사언전 신라이당설인귀위산신(紺岳祠諺傳 新羅以唐薛仁貴爲山神)."
분명 설인귀는 원한에 간 인물이었거나 선정(善政)을 베푼 장군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우리 무속의 현장에서 만나는 장군들의 삶의 이력서를 들춰보노라면 대개가 그런 유형(類型)이 많기 때문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앞에서 언급한대로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도호라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고 그가 죽고 난 뒤 신라인들은 무속신(巫俗神)으로 신격화하여 그의 덕치(德治)를 기리고 그의 위용을 흠모하는 제(祭)로 승화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서울 남이(南怡)장군 대제는 어떤 성격의 축제일까 ? 남이 장군은 조선전기의 무신으로 1457년,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이 나자 대장이 난을 평정한 후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가 후에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한번은 그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彗星)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모함함으로써 역적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새남터에서 참변을 당한다.
역적으로 몰린 그의 영혼을 집권자들이 제례를 지내 줄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는 1818년 같은 성씨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직이 복구되었고 창령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현존하는 용문동의 야트막한 산봉우리 위에는 그의 사당이 자리하여 그가 칼날을 받았던 형장을 지켜보고 있다.
예나 이제나 역사를 움직이는 일에는 준재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하고 많은 장군, 재상 중에서 민중이 뽑은 인물은 역사의 앞쪽을 달려가다가 뒤편으로 물러나게 된 신원을 못 푼 장군이나 재상들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