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독서|우리 시대의 명저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종교적이건 합리주의적이건 모든 도덕가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인간 집단행동의 야수적 성격과 모든 집단적 관계들에서 이기심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힘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비현실적이고 혼란된 정치사상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모든 도덕적인 사회 목표들에 대해서 집단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하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갈등을, 도덕적으로 인정된 목적들을 획득하기에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간주하든지, 아니면 보다 완전한 교육과 보다 순수한 종교가 달성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임시방편 정도로 간주한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성, 이성이 편견과 격정에 쉽게 굴복하는 일 그리고 특히 집단적 행동에서 비합리적 이기주의의 끈질김 등에 비추어볼 때, 사회적 갈등은 인간의 역사에서 끝까지 불가피한 것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이나 쓰레기 소각장이 건립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으레 지역 주민들의 거센 저항이 뒤따르곤 한다. 방사능 폐기물이나 쓰레기는 오염 물질이라 그렇다 치고 납골당이나 정신병원, 치매 병동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시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님비 현상❶이니 무어니 라며 언론은 이들을 몰아붙이지만, 누구나 처지가 바뀌면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되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하자며 다양한 제안이 쏟아지지만 그 내용 역시 매번 비슷하다.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고 공공 이익을 중시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도덕성이 높아진다고 과연 문제가 해결될까?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익숙한 해법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학자가 있으니, 바로 미국을 대표하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다.
니버는 ꡔ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ꡕ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내면세계와 조직적 사회생활 사이에서 도덕적 모순과 갈등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니버가 보기에 인간 개개인은 충분히 이타적일 수도 있고 도덕적일 수도 있다. 사랑과 정성으로 제자를 기르는 선생님이나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자들을 보면 ‘고매한 도덕성을 가진 개인’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에 비해 집단의 도덕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데 있다. 아무리 도덕적인 개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행위가 반드시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례로 미국은 금욕주의적 청교도❷ 윤리와 선진적인 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지만, 우리는 미국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수차례 전쟁을 벌인 모습을 보아 왔다. 개인 윤리의 총합이 집단의 윤리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현실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개인의 이기성에 비해 집단의 이기성이 더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직이 통일성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구성원에 대해 강제성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친밀한 사회 집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조직들은 강제력이 없으면 합리적으로 운영되기가 매우 어렵다. 집단에 속한 개인은 강제성에 굴복해 개인의 도덕성보다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집단이 커질수록 자연히 도덕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집단의 이해에 따라 이기적 충동에 쉽게 휩쓸린다. 따라서 집단들의 관계는 윤리보다는 정치적인 속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집단적으로 희생을 감수하려는 여러 행위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를 들어 애국심은 모든 국가가 강조하는 기본적 덕목 중 하나다. 국가 전체를 위한 희생은 사회의 귀감이 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니버의 관점에서 보자면 애국 활동조차도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한 국가의 이기심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神風〕는 일본에서는 영웅대접을 받았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 연합국에게는 악마 같은 존재였다. 애국심도 개별 국가의 관점을 벗어나면 집단 이기주의의 한 예가 되는 것이다.
개인 윤리와 집단의 윤리를 자꾸 구별하려는 니버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이타심을 강조하는 개인윤리에 비해 정의를 강조하는 사회윤리는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권력과 힘의 불균형 때문이다. 니버는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집단간의 관계는 각 집단이 갖고 있는 힘의 비율에 따라 형성된다고 보았다. 사회적 파워가 강한 집단은 관습이나 법을 결정하는 데 유리하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받는 부당한 대접들은 그들이 소수이고 약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임금인상은 노동조합의 힘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프랑스의 소요사태를 보면 관용의 문화를 자랑하던 프랑스조차도 빈부 격차와 인종 차별이 뿌리 깊게 자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니버는 권력을 불공평하게 소유한 집단들 사이에서 개개인의 도덕성에 호소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은 결코 합리적 방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특권층의 기부를 장려하고 개인들의 사회봉사를 확대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니버가 보기에 이런 식의 대안은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데에만 효과적이며, 오히려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제도적 노력을 가로막게 된다. 교육을 통해 개인의 양심을 자극하고 이성에 호소한다 해도 결과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집단’이라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고 이타적인 사회 세력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집단 사이의 이기적 갈등이 사회 권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사회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윤리 의식을 고양시킨다 하더라도 집단의 도덕성으로 발휘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갈등은 정치적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니버는 갈등 해소에 있어서도 무조건 폭력에 반대하거나 평화적 자세만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인도의 간디가 불복종 운동을 벌였기에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 니버는 도덕주의자들이 부각시키려 하는 ‘평화적 합의’에도 비판적이었다. 사회적 강자가 교묘하게 제도를 이용하여 약자를 압박하거나 여론의 흐름을 지배한다면 폭력이 없이도 사회적 약자들은 충분히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이런 관계에서 이성적으로 합의하고 평화적으로 조정만 하라는 것은 물리력을 동반한 것보다 더 큰 강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버는 궁극적으로 합리적이고 평등한 이상적 사회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개인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노력해도 집단적 차원에서의 사회갈등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버가 그리는 사회는 다소 추상적이다. 니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충분한 정의는 있되 개인들의 공동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으로 되는 그런 사회”이다. 비폭력적이며 공정한 방식으로 집단간의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한 사회 제도적 노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책 ꡔ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ꡕ는 1932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고, 유럽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운이 팽배해 있었으며, 아시아 여러 국가들도 식민지 상태였다. 그러니 선진 사회는 계급 갈등이 사회 전면에 표출되어 물리적 갈등을 겪었고, 식민지 국가들에게는 선진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위선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의 논조는 다소 비관적이다. 니버가 풀고 싶어했던 시대적 관심은 분명 오늘의 우리 시대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니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회 정의의 실현에 있어 윤리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통찰이 동시에 필요함을 역설하는 데 있다.
〈더 읽어 봅시다!〉
김수중 외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타하르 벤 젤룬의 <인종 차별, 야만의 색깔들>
1. 님비 현상_ ‘Not in My Back Yard’의 머리글자를 딴 신조어로, ‘내 뒷마당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마약 중독자, 범죄자, AIDS 환자, 산업 폐기물 등 각종 사회 병폐를 수용하거나 처리할 시설물을 설치하려 할 때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보이곤 하는데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현상을 가리킨다.
2. 청교도_ 16~17세기 영국과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신 종파로, 로마 가톨릭의 제도와 의식 일체를 배척하고, 엄격한 도덕주의, 주일(主日, 일요일)의 신성화,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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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교 독서평설>(2005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